평범한 여학생의 이야기가 어느 순간 어린 날의 내 이야기로 다가오는 순간, 그리고 영지 선생님을 보며 현재의 나를 떠올리는 순간이 있었다.
지금은 소식을 모르는 친구들의 이름을 통해 내가 은희였을 때를 기억한다. 친구들 속에서 웃고 있는 나. 불안감을, 내 어두움을 감추려고 친구들 안에서 더 많이 웃고 있는 내가 있었다. 크고 작은 사건들도 있었지만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던 보통의 날들.
그동안 못 본 영화를 몇 개월간 몰아치듯 보면서, 내 평범한 기억들이 영화 속에서 재생된다고 느꼈을 때 마음에 오래남는 영화가 되는 것 같다. 보이후드와 로마가 그랬고 벌새도 그렇다.
영화를 보고 내게 특별했던 선생님을 떠올린다.
7살, 엄마와 처음 피아노학원에 가서 인사를 했던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조금 어두웠던 나무 벽과 친절했던 선생님의 첫인사. 통통하면서도 가는 손끝으로 피아노를 치던 선생님의 하얗던 손. 우리집 고추장에 찍어먹는 멸치를 좋아하셔서 자주 가져갔던 도시락. 선생님 집이었던 마을 안 쪽 교회에 놀렀갔던 날. 학원 캠프에 가지 못한 나를 위해 바닷가 어느 마을로 놀러갔던 1박 2일. 거기서 말벌에 쏘인 선생님이 엉엉 울었던 모습. 어느날 갑자기 뉴질랜드 유학을 떠나신 선생님.
어렸을 때의 기억들은 흐릿하고 단편적인데 선생님과의 어떤 추억들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내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다시 재생, 다시 재생을 반복하고 있어서일까.
영화를 보고 나무 아래를 걸으며 영화를 곱씹을 때, 깊은 곳의 내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르며 또 다른 은희가 되었다. 그리고 의문스러웠던 영화의 어떤 장면이 이해가 되는 순간 마음이 아팠고, 얼른 다시 영화를 보고싶어서 집으로 향했다.
위로가 되는 영지 선생님의 모든 대사와 편지를 기억하고 싶다.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그래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마. 함부로 동정할 수 없어. 알 수 없잖아.
자기를 좋아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애.
나는 내가 싫어질 때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해.
아, 이런 마음들이 있구나. 나는 지금 나를 사랑할 수 없구나 하고.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은희야, 너 이제 맞지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싸워. 알았지?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학원을 그만둬서 미안해
방학 끝나면 연락할게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이야기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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